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다들 기뻐했다. 집에 꽂아 놓고 읽지 않았던 그의 책을 몇 권 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지난 해 11월 카톡으로 함께 이 책을 읽는 모임이 열렸다. 하루에 1챕터씩 모두 11일간. 그 때 나눈 감상을 모았다.
인생과 화해하지 않았지만 다시 살아야 했다.(15쪽)
주인공 경하는 소설가다. 경하의 이야기가 한강 작가 개인의 이야기로 자꾸 겹쳐 읽혀서 오히려 거리를 두고 읽기가 더 힘들었다.
광주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검은 나무들의 무덤 꿈을 꾸고, 그 꿈의 고통을 온 몸으로 겪은 경하의 연대기는 한강의 이야기와 연도까지 정확하게 일치한다.
어째서 이 한 명의 작가가 비극의 고통을 몸과 영혼으로 감당하는 일을 맡았을까 싶어 안쓰러우면서도 답답하게 읽었다.
노벨상수상작이라니 뭔가있겠다 싶어서 읽고 있는거지, 그게 아니라면 계속 읽기가 참 힘들었을 것 같다.
꿈 속의 광경, 나무둥치가 서 있는 벌판이 언젠가 가 보았던 제주 4.3 평화공원 같았다.
공원이 만들어진 초기였다. 내가 갔을 때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려서 더 을씨년스러웠다.
꿈 이야기에서 그 광경이 생각나 작가의 고통이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4.3을 이야기하는 이 작품을 시작하면서 왜 작가는 당시의 이야기나 사람이 아니라 지금, 정확하게 2010년대의 사람들, 그것도 자기 자신과 겹치는 인물을 내세웠을까.
지금은 물론 손가락을 지키는 편의 통증이 더 강하지만, 손가락을 포기할 경우 통증은 손쓸 수 없이 평생 계속될 거라고. (의사는 말했다) -42쪽
손가락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 잘려나간 사람들과 우리를 잇지 않으면 우리도 평생 고통에 시달리리라는 비유 같다.
그런데 왜 그 고통은 살아남은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을까?
왜 누구는 수백명의 고통을 짊어지며 힘겨워하는 동안 누구는 아무렇지도 않은 채 살아갈까.
왜 누구의 영혼은 한지처럼 얇고 애처로운데 누구는 마분지처럼 두껍고 투박할까.
경하와 인선.
2챕터에 와서 등장인물의 이름이 등장한다.
인선이 호출하는 경하.
경하가 호출하는 인선.
이름은 다른 이가 불러줄 때 비로소 이르는 말이 된다.
경하라는 이름은 한강이라는 작가 이름의 ㅎㄱ을 앞뒤 바꿔 만든 이름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그날 똑똑히 알았다는 거야. 죽으면 사람의 몸이 차가워진다는 걸. 맨뺨에 눈이 쌓이고 피 어린 살얼음이 낀다는 걸.(84쪽)
눈이 귀한 부산에서 자란 나에게 눈은 지금까지도 반가운 손님인데, 이 책에 등장하는 눈은 죽음이다.
친구의 부탁으로 제주도를 찾는 경하를 맞이하는 폭설과 눈보라는 어쩌면 죽은 이들이 경하를 맞이하는 예전(liturgy)인지도 모르겠다.
하루 한 챕터씩 천천히 읽고 한 문장을 찾기 위해 다시 뒤적이다보니,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것저것 이 사람 저 사람이 자꾸 뭔가를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깊이 신경쓰지 않고 그냥 이야기로 쭉 읽어가면 될는지, 아니면 눈은 무슨 의미일지, 낯선 남자는 어떤 장치일지.
박명 속에 수천 그루의 높은 나무들이 눈발 속에 흔들려, 마치 내 오랜 꿈속 검은 나무들이 아직 살아 있던 풍경 같다.(123쪽)
서울의 흩눈.
제주도의 폭설.
그 속에 고요마저 느껴지는 이 곳은 그 눈폭풍의 진원지 같은 느낌이다.
마지막 문장에서, 이 곳이 경하를 부른 것 같은, 마침내 그 꿈의 장소에 다다른 듯 한 느낌을 받았다.
버스의 할머니는 경하를 마중 나온 제주의 마음일까.
여기에 나오는 새 얘기는 양쪽의 시선을 두고 살아가는 가벼운 존재다.
땅에 정착하지 못하고 앞만을 바라보지 못하고 부유하며 분주한 이미지입니다.
말 못하는 앵무새의 존재가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 듯 한 생각이 든다.
그날 이후 아무도 오지 않은 거다.
...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바람이 몰아쳐 들어가고 았다. 눈부신 빛을 내쏘는 눈가루들이 함께 공방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142쪽)
5의 제목은 남은 빛.
4의 끝에 등장한 박명(엷은 빛)을 이렇게 표현했나 싶은데 글쎄. 엷은 빛은 경하를 건천으로 몰아넣기도 하고 간신히 살아남게 해주기도 했지만, 심술궂다. 남은 빛은 아무래도 인선의 공방에 켜진 불빛이 아니었을까.
'그날 이후 아무도 오지 않은 거다.'를 굳이 한 문단으로 나눠 둔 것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4가 희망찬 박명으로 끝났는데 5는 시작하자마자 뜻밖의 낭떠러지와 사지로 몰아넣는다.
왜 경하를 공방까지 순탄하게 보내지 않았을까.
공방까지 이르는데에 여러 우여곡절을 만들어 책의 절반까지 돼 버렸다.
한 문장 한 단어 신중하게 쓰는 작가가 의도 없이 이러지는 않았으리라.
남은 빛을 만나기까지 여정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긴데, 4.3의 비참함에 놀라고 비통하려고 준비한 독자를 제풀에 지치게 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비극을 지나 가버린 특별하고 예외인 일로 여기지 말고, 지금의 많은 비극과도 다르지 않은 이야기로 느껴보라는 뜻일까.
혹 그냥 한 많은 원혼들의 짓궂은 장난일까,
어쩌면 반대로 저 깊은 눈보라 속에 파묻혔던 사연들을 캐내는 과정이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고단하리라는 예고 일까. (예고라면 너무 길긴 하다.)
깊은 어둠과 고요 속에서도 남아 있던 빛.
엷은 빛 때문에 오히려 찾기 힘들었던 남은 빛.
새 한 마리의 목숨을 지켜주던 빛. 아, 빛이 저기 남아 있으니 아직 새는 잠들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인가!
속섬허라. 동굴에서 아버지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에요. 숨을 죽이라는 뜻이에요. 움직이지 말라는 겁니다.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는 거예요.(159쪽)
내 손에서 귤을 건네 받으며 아버지는 반쯤 웃었어요. 마치 두 섹를 사는 사람 같았어요. 한 눈으로 나를 보고 다른 한 눈으론 내 몸 너머 다른 빛을 보는 것같이. 어두운 방인데도 부신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올려다봤어요.(165쪽)
-죽으러 왔구나. 열에 들떠 나는 생각한다. 죽으려고 이곳에 왔어. 베어지고 구멍 뚫리려고, 목을 졸리고 불에 타려고 왔다. 불꽃을뿜으며 무너져 앉을 이 집으로. 조각난 거인의 몸처럼 겹겹이 포개져 누운 나무들 곁으로.(172쪽)
또 반전.
빛은 남았지만, 새는 죽었다니.
경하가 새를 장사 치르고 인선의 옷을 입고 누워 다큐멘터리를 생각하는 장면이 지극히 연극적인 느낌을 받았다.
가식이라는게 아니라 마치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상징극 같은 느낌이랄까.
공방 이야기는 어쩌면 눈에 파묻힌 경하의 꿈이 아닐까, 아니 인선이의 문자를 받고 여기까지 온 이야기 전체가 경하의 꿈은 아닐까 생각이 들면서 현실과 꿈, 현재와 과거가 하나로 뒤섞이는 느낌.
눈 속 무덤을 내 손으로 파헤쳤을지도 모른다는 걸 나는 깨달았다. 삭은 뼈들을 내가 삽으로 부수고 손갈퀴로 흐트러뜨렸는지도 모른다. -197쪽
꿈과 현실이 뒤섞이는 줄 알았더니, 죽음과 삶이 비벼지고 있었다.
인선이 죽은 걸까, 경하가 죽은 걸까. 아니면...?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목이 무슨 의미인지 아직 모르겠는데, 죽음이 삶을 떠나지 못하고 삶이 죽음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작가는 그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이리 길게 경하를 고생시키고 있는 걸까.
주말 오후가 되면 약간 쓸쓸해진다.
누군가 콩죽을 끓여준다면 먹어보고 싶다.
......누군가 더 있는 것 같을 때가 있어. -208쪽
한강 작가의 문장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감각을 더 의미심장한 경험으로 이어주는 것 같다.
한 문장 한 문장에 깊은 고민이 담겨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영어나 외국어 번역본에서는 제주도 사투리를 어떻게 표현했을까 궁금해진다.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220쪽
절멸이란 말에 잠시 숨이 멈추는 듯 했다.
76년전.그 절멸의 광기가 지금 다시 일어나는 걸 보기 때문이다.
요즘 커뮤니티나 소셜미디어에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없애버리고.싶다는 증오를 자주 접한다.
그 명단은 빨갱이 간첩도 있지만 토착왜구 2찍도 있고 기레기 판레기 견찰 태극기 촛불 짱깨 페미 일베... 갈수록 늘어간다.
멸절의 마음이 권력과 결합하면 그게 지옥이다.
세상을 정화하겠다며 스스로 지옥을 만드는 일은 왜 끊임이.없을까.
우리 모두가 청동기인을 멸절하고 살아남은 철기인이기 때문일까.
아버지을 위한 영화가 아닙니다. 역사에 대한 영화도 아니고, 영상 시도 아니에요. -236쪽
그렇다면 이 소설은 무엇일까.
역사라는 말로 박제하지 말고, 시라는 말로 추앙하지도 말고, 우리가 그 불로 무너진 터에 올린 집에 살고 있다는 걸 기억하자는 낮은 목소리의 부탁일까.
심부름 간 언니들을 만나려 피투성이로 기어가던 아기의 보드라운 입술일까.
아이 아기 아저씨 아주머니 이모 숙모.. 그 영혼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저 파돗소리에 바람소리에 새들의 눈동자 속에 머물러 있다는 속삭임.
바위 전설을 롯 이야기와 대조하는 말씀들을 흥미롭게 읽었다.
물속의 적막 같다. 창을 열면 검은 물살이 쏟아져 덮칠 것 같다.-254쪽
5장은 한국전쟁 이후 4.3이 오랫동안 묻혀온 시간을 침잠에 비유하는 듯 보인다.
4.19 직후 잠깐 남은 자들의 연대가 있었지만 이내 바닷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퇴적해온 마음들이 감정 없는 표정과 목소리로 무뎌지기까지의 과정을 정성어린 문장으로 압축한 기록한 다시 들춰 읽는 기분이다.
짧은 챕터로 그 시간들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갯바위에 부서지는 흰파도를 보며 먼바다의 물결을 상상하듯 막연히 짐작해볼 뿐입니다.
그때부터 엄마 안에서 분열이 시작된 건지도 몰라. 두개의 상태에 그날 밤의 오빠가 동시에 있게 된 뒤부터.-291쪽
가끔, 우리 현대사를 읽다보면 식민지 전쟁 독재 가난 죽임의 시대를 겪어오신 저희 부모 세대는 트라우마와 분열된 정신 속에 살아 남으신 것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한 편으로는 내가 그 뒤에 태어나 안도했다.
인선이나 정심은 그 고통과 상처를 보듬으려고 애쓴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확장하지 못하는 그 어지러운 마음을 말이다.
경하도 그 길로 들어선다.
데 스스로를 지키기도 힘든데.
이런 분들 정말 존경스럽다.
이 장을 읽으면서 지난해 일본에 갔을 때 아사쿠사 인근에서 갔었던, 하루방을 세워 놓은 한국식당이 생각났다.
당시 제주도에서 밀항으로 일본에 간 분들이 많았다는데, 어쩌면 인선의 외삼촌은 거기 어디쯤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하지만 네 손이 잡히지 않는다면, 넌 지금 너의 병상에서 눈을 뜬 거야.
다시 환부에 바늘이 꽂히는 곳에서, 피와 전류가 함께 흐르는 곳에서.
-324~325쪽
경하나 인선이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싶다.
살아서 사랑의 이어짐, 1948년 제주도 P읍에서 2022년서울까지 이어지는 긴 이야기가 계속 생명의 불꽃을 이어간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소년이 온다’와 다르게 ‘작별하지 않는다’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이야기를 전개하는지 잘 감이 잡히지 않았다.
비극의 재현이 목적이었다면 정심의 이야기만 잘 정리해도 되었을 터이고,
고통의 전달이 목적이었다면 더 적나라하게 잔인할 수 있었을테고,
폭로를 마음 먹었다면 더 극적이고 정치적이어야 했을 텐데.
굳이 경하를 주인공으로 하고 인선과 새와 폭설을 경유해 정심과 아버지에게 닿고 경산 코발트 광산과 인선의 15년 공백 이야기까지 해야 했던 이유가 뭘까.
약간은 어설픈(?) 추리극 형태로 독자를 오라고 오라고 이끌기로 한강 작가가 맘 먹은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3부에 와서 납득이 갔다.
1970년생인 작가는
자신을 닮은 경하가 4.3의 사연들을 알아가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 세대(저는 72년생입니다)가
오래 덮여 있었던 과거의 비극을 알게 되고
그 고통을 묵상하고
추모하기에 이르는 과정 자체를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생각했다.
1987년하고도 한참 후 다시 봉인이 열려
경심과 제주 사람들의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다시 목소리를 얻었을 때,
그건 경하 같은 서울내기는 물론 인선 같은 젊은 제주의 자식들에게도 낯선 것이었고,
너무 늦은 개봉으로 모든 이야기를 다 듣지는 못하였지만
경하와 인선(과 그의 세대들)은 새와 눈과 바람과 촛불을 지나며
그 고통의 흔적이 남은 지문을 다시 만지고 성냥개비 하나라도 켜려 했다는 것.
그 과정,
우리 세대가 4.3을 알아가는 과정 자체가
비참이나 고통의 재현이 아니라
오래 묻혔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그 속으로 들어가는
사랑의 이야기로 남기를
작가는 바란 것 아닐까
맘대로 해석했다.
그리고 작가의 그 뜻에 내 맘대로 공감하였다.
학살과 처단의 기록을 읽으면 인간의 검은 심연을 들여다 본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내가 그 어둠을 닮아버릴 것 같다.
한강 작가가 ‘소년이 온다’나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면서 당사자들의 고통을 다시 겪기 위해 여러 해 동안 애썼다는 얘기를 했을 때, 그 심연에 빨려들어가지 않으면서 고통에 동참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 대단한 작가이고, 고마운 작가다.
이제 그 결론이 사랑이라서 더더욱 감사하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였는데, 이 책의 한 문장 한 단어마다 죽음과 고통을 이기고 사랑을 담으려는 노력이 담겨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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