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 김춘미 옮김, <인간실격>, 민음사, 2004
1909년 태태어나 1948년 투신 자살한 일본의 작가. 자신이 고리대금업 집안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고 젊은 시절 좌익 사상과 기독교에 매력을 느낌.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하고 진통제에 중독되기도 한 이력이 작품에 녹여 있는 ‘인간실격’은 자전적이면서 유작인 작품.
일본 동북지방의 유지 집안에 태어난 오바 요조는 어린 시절 유모와 하인에게 학대 당한 뒤 두려움과 불안을 익살로 가장하며 성장했다. 도쿄에 진학하면서 만난 여자와 동반 자살을 기도하고, 학교를 그만 둔 뒤 잡지에 만화를 그리기도 하다 약물 중독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귀향하지만 스물일곱의 자신은 이미 마흔이 넘은 얼굴이 되었다.
일본의 사소설(私小說)들은 참 묘한 매력이 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도 그렇다.
주인공은 천하의 잡놈이자 최하급 인간.
이렇게 한심한 인간 이야기를 왜 읽고 있나 하는 회의감이 드는데, 문득 나는 얼마나 다른가, 사실은 나도 나약하고 비겁하긴 마찬가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올라온다.
세상에선 이런 작품을 고전으로 치켜세우고 읽기를 장려한다는 걸 떠올리면, 사실은 사람들은 다 비슷하게 비겁하고 비슷하게 나약하구나 하는데까지 생각이 이르면서 안도감이 들기까지 한다.
주인공 오바 요조는 굶주림을 겪어 본 적 없는 유복한 집안에 태어나, 한번 얼굴만 비취면 여자들이 혹하고 넘어오는 매력까지 갖췄다.
행복의 조건은 다 갖춘 셈이지만, 그에겐 자신의 행복이나 세상의 행복을 받아들일 수 없는 깊은 상처가 있다.
소설에는 그 트라우마가 어린 시절 겪은 성추행(?)인 듯 슬쩍 얘기한다.
하지만, 이 작품이 발표된 시기가 일본 패망 직후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달리 생각된다.
전쟁이라는 무지막지한 물질공세와 제국주의 폭력을 찬양하던 세계가 한 순간에 몰락했다.
전쟁 속에 자라 패전 시대의 성인이 된 세대가 공통으로 가진 정신적 트라우마일지도 모르겠다.
전쟁과 폭력에 저항하지 않고 그 위에 올라탔던 이들이 전후에 마주쳐야 했던 죄책감과 상실감, 도덕적 패배감 같은 것.
그 때문에 당시 일본의 청년들이 이 작품에 열광했던 것 아닐까.
그렇다면 왜 지금도 요조의 이야기가 읽히는걸까.
요조가 슬쩍 드러내는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허무함이 뒤섞인 태도가 기성의 세계를 거부하는 어떤 저항처럼 보이는 걸까.
아니면 인간 세계의 모순에 끝까지 아파했던 요조의 마음에 공감하는 독자들이 늘 있기 때문일까.
요조는 왜 그리 자신을 괴롭힌 것일까.
예민한 영혼, 기성의 태도를 거부한 이들은 일탈과 도피가 아니면 견디기 힘든 시대였던 걸까.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13쪽)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문장을 보면 참 슬프다. 어릴 적 유모와 하인에게 당한 성적 고통이 무엇이었는지 저자는 밝히지 않는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고만 얘기한다. 이 후 자기를 괴롭히고 스스로를 부정하는 생애를 산다. 트라우마가 느껴진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익살이었습니다. …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17쪽)
왜 그랬는지, 어릴적 익살꾼이었던 친구들이 생각났다.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 전율하고 또 인간으로서의 제 언동에 전혀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고뇌는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상자에 담아두고 그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기고 또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낙천가인 척 가장하면서, 저는 익살스럽고 약간은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19쪽)
뭐야, 인간에 대한 불신을 말하고 있는거야? 흥, 네가 언제부터 기독교인이 됐는데? 하고 조소할 사람도 혹시 있을지 모릅니다.(26쪽)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27쪽)
그렇지만 그 사람은 말로 “쓸쓸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무언의 지독한 쓸쓸함을 몸 바깥에 한 폭 정도 되는 기류처럼 두르고 있어서, 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이쪽도 그 기류에 휩싸여 제가 지니고 있는 다소 가시 돋친 음산한 기류하고 적당히 섞여서 ‘물속 바위에 자리 잡은 낙엽’처럼 제 몸은 공포나 불안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62쪽)
-긴 문장 하나. 쓸쓸한 분위기의 여자에 이끌리는 주인공의 정서를 표현했다. 상처 받은 사람은 상처 받은 사람을 알아보고, 동질감을 느끼고, 다가가고, 서로 상처를 준다. 쓸쓸하다.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62쪽)
-나도 이런 겁쟁이다. 어쩌면 이 시대는 이런 겁쟁이로 가득하다.
저는 하나님조차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벌만을 믿었던 것입니다. 신앙,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채찍을 받기 위해 고개를 떨구고 심판대로 향하는 일로 느껴졌습니다. 지옥은 믿을 수 있었지만 천국의 존재는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90쪽)
아아.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조사 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92쪽)
세상이란 게 도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형일까요.(93쪽)
세상. 저도 그럭저럭 그것을 희미하게 알게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노예조차도 노예다운 비굴한 보복을 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오로지 그 자리에서의 한판 승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럴싸한 대의명분 비슷한 것을 늘어놓지만,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개인. 개인을 넘어 또 다시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大洋)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 라며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의 환영에 겁먹는 데서 다소 해방되어 예전만큼 이것저것 한도 끝도 없이 신경 쓰는 일은 그만두고, 말하자면 필요에 따라 얼마간은 뻔뻔하게 행동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97쪽)
-주인공의 세계관. 눈치를 보고 불안해하던 주인공이 조금은 더 자신의 감정에게 충실하도록 만든.
과연 무구한 신뢰심은 죄의 원천인가요?(118쪽)
그렇지만 그때 저는 그렇게 반미치광이처럼 원하던 모르핀을 실로 자연스럽게 거절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느님 같은’ 요시코의 무지에 감동한 것일까요. 저는 그 순간 이미 중독자가 아니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요.(130-131쪽)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131쪽)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133-134쪽)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쁜 거에요.”
마담이 무심하게 말했다.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눈치 빠르고...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느님같이 착한 아이였어요.”(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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