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외갓집 대학생 형들 책장에서 이 책의 표지를 본 기억이 난다. 검은 바탕에 엑스가 커다랗게 그어져 있는 표지가 인상적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 말콤 엑스는 뭔가 삐딱한 인간이구나 하는 걸 확실하게 알려주는 표지였다.(그 책은 70년대에 출간된 해적판이었던 것 같다. 번역이 개판이었다고 한다. 안 읽길 잘했군!)
잘 생겼다. 아래에 있는 영화 말콤엑스의 덴젤 워싱턴과 비교해도 될 정도다.
말콤엑스 자서전을 읽다
실제로 이 책을 읽은건 4년전 '적과 함께 사는 법'을 쓰기 위해 자료를 모을 때였다.
마틴루터 킹과 말콤엑스를 비교하기 위해서, 그의 연설을 모두 모은 자료와 영상 영화 전기 등등을 보았지만 뭔가 성에 차지 않았다. 이 인간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나.
외갓집에서 표지만 보았던 책이 생각나 검색해보니 오래 전에 절판됐다. 인터넷 중고서점 덕분에 어렵사리 구했다. 검은 바탕에 X를 크게 쓴 표지는 해적판과 같았다. 90년대에 새로 편집한 판본인데도 한 쪽에 29줄씩 빽빽하게 편집했다. 언제 다 읽지? 했는데 책을 펼치자 마자 빨려들듯이 읽어내려갔다.
미국에서 출간된 판본에도 한국 같은 표지는 없다. 해적판의 X 표지는 도대체 누구의 아이디어였을까?
말콤엑스 스토리
말콤엑스는 뉴욕의 뒷골목에서 자랐다. 백스트리트 흑인 청년의 전형적인 코스를 밟으며 범죄의 세계로 빠져들었으나 교도소에서 이슬람국가(Nation of Islam. IS와는 다름)이라는 사이비종교를 만나면서 거듭난다(?).
이슬람국가는 한 흑인 사이비교주가 이슬람을 참칭해 만든 사이비 종교였다. 백인은 악마, 흑인은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주장을 퍼트리며 당시 인권에 눈을 떠가던 흑인들을 현혹했다. 말콤엑스에게 이슬람국가는 아마도 생애 처음으로 접한 '세계에 관한 해답'이자 체계를 갖춘 세계관이었을거다. 말콤엑스는 이슬람국가의 충실한 성도가 되었다.
출소한 뒤 그는 이슬람국가를 찾아간다.
이런 분위기였다고 한다.
사이비교주는 이 당돌한 흑인청년을 잘 키워 자신을 대신할 젊은 사제로 만들었다. 말콤엑스의 거침없는 언변과 백인을 향한 저주의 설교는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 교주의 인기를 능가하던 말콤엑스는 이내 이슬람국가의 대변인까지 되었다.
하지만 몇가지 사건을 겪으며 이슬람국가를 떠난다. 결정적인 건 사이비교주의 성범죄와 비리였다.
그때까지도 이슬람국가가 정통 이슬람 종교의 한 종파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말콤엑스는 "이 참에 진짜 이슬람 국가를 가보자"라며 사우디 아라비아로 하지 순례를 떠난다.
만약 이게 영화였다면 진짜 말도 안되는 설정인데, 1960년대의 세계에선 가능한 일이었다.
사우디에 간 말콤엑스는 공항(인가 비행기 안인가 하여튼)에서 그냥 아무나 붙잡고 "나는 미국에서 온 이슬람 교도인데 성지순례를 왔다"며 도움을 청한다. 그런데 그 아무나가 바로 딱 사우디 왕족!
그때만해도 세상은 낭만적이었는지, 같은 무슬림이라는 한마디 때문에 이 왕족은 흑인 청년을 왕궁에 초대한다. 많은 사람들이 말콤엑스를 환대하고 방을 제공하고 성지순례까지 다 시켜준다.
생애 최고의 환대를 받은 말콤엑스는 감동의 물결에 빠진다. 아아, 이 사람들은 흑인도 아닌데, 아니 어떻게 보면 차라리 백인에 가까운데.. 왜 나에게 이렇게 잘해줄까. 백인은 악마이고 흑인만이 살아남아야 한다고 했던 나의 설교는 틀린걸까. 인간은 정말 피부색에 상관 없이 형제가 될 수 있는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나!
새로운 깨달음과 질문을 얻은 말콤엑스는 미국에 돌아와 그 전과는 다른 흑인 인권 운동을 모색하기로 한다.
1992년에 나온 스파이크리 감독의 영화 포스터가 한국 해적판 표지와 닮았다. 영화도 상당히 재미있다. 덴젤워싱턴은 말콤엑스가 살아서 돌아온 듯한 연기를 선보인다.
말콤엑스와 알렉스 헤일리
말콤엑스는 사우디로 떠나기 전부터 알렉스 헤일리를 만나왔다. 막 등단한 젊은 작가였던 알렉스 헤일리는 플레이보이였는지 타임지였는지 하여튼 인터뷰 기사를 쓰는 저널리스트로서 말콤엑스를 만났다. 알렉스 헤일리는 미국에서 기세를 넓혀가던 흑인 민권운동의 맨 얼굴을 취재하기 위해 가장 야성적이었던 인물인 말콤엑스를 취재하기로 마음 먹고 몇차례 심층 인터뷰를 했는데, 말콤엑스는 뜻밖에도 자신이 이슬람국가 안에서 겪고 있는 심리적 갈등과 회의감을 털어놓았다.
일설에 의하면 말콤엑스는 알렉스 헤일리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이슬람국가에 반감을 가지고 떠날 작정을 하고 있었는데, 알렉스 헤일리가 그를 설득해 이슬람국가를 비난하거나 공격하기보다는 '활동을 중단하고 이별하는' 방식을 택하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알렉스 헤일리는 자서전 곳곳에 말콤엑스가 회의하고 번민하는 장면을 집어 넣어 그가 단순히 흑인을 자극하고 흥분시킨 인물이 아니라, 현실에 분노하고 앞길을 고뇌하는 젊은 예언자로 묘사했다.
책이 나오고, 그 뒤
어쨌든. 사우디에서 돌아온 말콤엑스는 맨하튼의 한 강연회에 초대를 받았다. 사회자는 이렇게 그를 소개했다.
"흑인의 편에서 흑인을 위해 싸우는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흑인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가 돼 있는 분입니다. 그의말씀을 듣고 그분의 진정한 뜻을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흑인의 행복을 위한 투사입니다."
박수 갈채가 쏟아지는 무대로 올라가기 전 말콤엑스는 이렇게 말했다.
"누가 과연 진정으로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가 무대에 오르자 한 사내가 일어서더니 품에서 총을 꺼내 쏘았다. 191cm 의 키에 85kg 몸무게의 육체에 16발의 탄알이 박혔다. 말콤엑스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눈을 감았다. 1965년 2월 21일 일요일 오후 2시였다.
말콤엑스를 쏜 남자는 이슬람국가 소속이라는게 정설이지만, 비슷한 시기 암살 당한 마틴 루터 킹처럼 CIA가 배후라는 소문도 끊임 없이 이어진다.
알렉스 헤일리는 말콤엑스의 전기를 정리하면서, 스스로 말콤엑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로 마음 먹는다. 요즘으로 치면 대필작가 혹은 고스트롸이터지만, 그냥 집필자라고 스스로 칭했다. 책의 뒷 부분에 말콤엑스가 사망한 뒤 일어난 일을 알레스 헤일리가 자신의 관점에서 정리했다.
그해 출간된 이 책은 곧바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타임지와 뉴욕타임스가 당대의 고전이자 필독서라고 칭했고, 알렉스 헤일리는 새로운 세대의 흑인작가로 떠올랐다. 스타작가로 떠오른 알렉스 헤일리는 이 책을 팔아 번 돈으로 자신의 조상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했다. 12년 뒤 '뿌리(ROOTS)'가 출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