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관세 폭주에 세계무역기구(WTO)는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미국의 보이코트로 상소기구가 마비된 지금, 법은 있지만 집행이 불가능한 상태다.
세계 무역 질서는 '불확실성'과 '정치적 힘겨루기'의 시대로 진입했다.
"우리는 더 이상 당하지 않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렇게 말하면서 4월 3일 새벽 중국, EU, 심지어 캐나다와 멕시코에까지 관세폭탄을 던졌다.
정당한 절차도 없었다.
WTO 규범을 무시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무런 제재도 없다.
1990년대 약소국이던 한국을 향해 관세를 낮추고 자유무역을 하라고 다그치던 그 WTO는 어디로 갔나.
답은 간단하다.
WTO가 사실상 제 역할을 못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무역기구(WTO)는 한 때 무역 경찰로 불렸다.
1947년 설립된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를 모태로, 1995년 WTO가 정식 출범하면서 세계 무역질서의 중심이 됐다.
당시 76개국이 회원국이었고, 지금은 164개국 이상이 가입해 있다.
세계 무역의 98% 이상이 WTO 체제 아래서 이루어진다.
WTO의 핵심 임무는 세 가지다.
이 중에서도 분쟁 해결 시스템(Dispute Settlement Mechanism, DSM)은 WTO의 ‘왕관의 보석(crown jewel)’로 불렸다.
국가 간 무역 갈등을 법적 절차를 통해 해결하는 장치였다.
정치적 압박이나 보복 대신 법의 힘을 행사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절차는 이렇다.
회원국 간 무역 갈등이 발생하면 WTO에 제소한다.
WTO는 전문가로 1심 패널을 구성해 판단을 내린다.
어느 한쪽이 판결에 불복하면, 상소기구(Appellate Body)에 항소해 최종 결정을 받는다.
이 결정은 법적 구속력이 있으며, 승소한 나라는 보복 권한도 가진다.
하지만 2019년부터 이 시스템은 마비됐다.
트럼프 행정부가 상소기구의 판사 임명을 거부하며, 상소기구 인원이 정족수(3명) 아래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WTO는 1심 판결은 내릴 수 있지만, 항소가 들어오면 ‘결론 없는 무한정 대기’ 상태에 빠진다.
이제 WTO는 심판은 있지만, 판결을 끝낼 수 없는 ‘무기력한 재판소’가 되었다.
미국은 바로 이 허점을 이용해, WTO 규칙을 위반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다른 나라들이 WTO에 미국을 제소해 승소하더라도, 미국이 상소만 하면 끝이다.
WTO는 이제 법은 있어도 지킬 이유가 없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법적으로 명백한 위반인데도 미국은 어떻게 빠져나가는 걸까?
그 비밀은 **IEEPA(국제긴급경제권법)**에 있다. 이 법은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면 자유무역협정이나 WTO 약속과 무관하게 관세를 올릴 수 있게 해준다.
트럼프는 멕시코 국경에서의 마약과 불법 이민 문제를 ‘비상사태’로 규정했고, 그 틈을 이용해 관세를 밀어붙였다. 국제법 위반이지만, 미국 국내법에서는 합법처럼 보이는 묘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유럽연합, 중국, 캐나다, 멕시코 등 미국의 주요 교역 상대국들은 트럼프의 관세 정책에 대해 즉각 반발했다.
보복 관세를 예고하고, WTO에 제소하는 등 대응에 나섰다.
하지만 문제는 WTO 규정 자체가 '무차별 원칙(Most-Favored Nation, MFN)'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다.
이 원칙은 ‘모든 회원국을 동일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럽연합이 미국의 관세를 피하려고 자동차 관세를 10%에서 2.5%로 낮춘다면, 중국·인도·브라질 등 다른 WTO 회원국에도 동일한 혜택을 줘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유무역 체제의 딜레마’다.
한 국가의 ‘규범 파괴’는 나머지 국가들까지 규범을 위반하게 만든다.
WTO 규칙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불리한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관세(tariff)는 수입 상품에 부과하는 세금이다.
국가가 국경을 통해 들어오는 상품에 세금을 부과해 돈을 받는다.
수입 상품 가격은 그만큼 더 비싸진다.
목적은 3가지다.
자기 나라 산업을 보호하거나,
정부 재정을 확보하거나,
외교적 협상의 지렛대로 삼기 위해 사용된다.
관세의 효과는 단순히 가격 상승을 넘어선다.
관세는 항상 양날의 검이다.
상대국이 보복 관세를 부과하면, 수출 산업이 타격을 입는다.
자기 나라 소비자는 더 비싸게 물건을 사야 한다.
무역이 활발해진 글로벌 사회에서 큰 나라의 관세 부과는 글로벌 공급망을 흔든다.
관세 인상은 단기적으로는 '힘의 상징'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세계 경제를 움츠러들게 만든다.
특히 WTO 체제는 관세의 단계적 인하와 예측 가능성 확보를 기반으로 작동해왔다.
다시 말해, "내일 관세가 얼마나 될지 예측할 수 있다"는 신뢰가 무역의 기본이었다.
트럼프식 관세는 그 신뢰를 뿌리부터 흔든다.
오늘은 2.5%, 내일은 25%.
예측할 수 없는 무역은, 곧 멈추는 무역이다.
일각에서는 "WTO는 이미 끝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조금 다른 시선도 있다.
미국의 ‘상호관세(Reciprocal Tariff)’ 전략은 WTO를 해체할 위협이자, 동시에 새로운 협상판을 여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WTO 규정 중 GATT 제28조는 ‘회원국이 일방적으로 관세 약속을 변경할 수 있도록 하되, 피해국과 협상할 의무’를 둔다.
미국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이는 30년 만의 대규모 재협상 라운드로 이어질 수 있다.
즉, WTO를 무력화시킨 장본인이 WTO를 다시 작동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무역은 원래 법보다 정치였다.
WTO는 그 정치적 혼란을 법으로 제어하기 위한 장치였다.
하지만 미국이 WTO를 무시하고 사실상 무력화시키자, 다른 나라도 WTO라는 제도를 믿지 않게 된다.
이제 국가들은 미국에 맞서기보단 ‘피해를 줄이기 위한 정치적 타협’을 택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에만 혜택을 주는 양자협상, 산업 보조금 확대, 자국 생산 회귀 등 WTO 원칙에 반하는 선택들이 이어질 것이다.
결국 무역은 다시 '힘의 논리'로 회귀하고 있다.
WTO는 과거처럼 ‘모두에게 같은 규칙’을 적용할 수 없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각국의 경제 모델이 너무 다르다.
중국의 국영기업, 인도의 산업보조금, 미국의 규제 완화 등은 하나의 규칙으로 묶을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각국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에 ‘가격’을 매겨 타협하는 새로운 시스템이다.
이를 통해 다시 ‘거래 가능한 무역질서’를 세워야 한다.
WTO가 살아남으려면, 바로 이 역할을 해야 한다.
트럼프의 관세는 WTO의 무기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동시에, 30년간 멈춰 있던 세계무역질서를 재정비할 기회도 제공한다.
미국이 무역의 룰을 깬 것은 맞다.
하지만 WTO는 여전히 룰을 지킬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지금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같은 룰 안에서 무역을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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