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최고봉 킬리만자로, 아프리카의 대초원 세렝게티, 아프리카의 보석 잔지바르 가 모두 이 나라에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탄자니아의 도시와 자연을 이해하려면 이 나라가 어떻게 독립해서 여기까지 왔는지 역사를 알아야 한다.
검은 대륙의 신생 독립국으로 생존과 발전을 위해 발버둥친 이야기를 알면, 거리의 풍광이나 세렝게티의 아름다움도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재와 부패, 극심한 빈부격차와 부족 갈등으로 지금까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탄자니아는 특이하게도 사회주의 정부가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나라를 이끌었다.
게다가 스와힐리어라는 아프리카 고유의 언어를 자신들의 국어로 삼고 아프리카 전체의 연대와 조화를 주장했다.
탄자니아라는 나라 자체가 아프리카의 정체성을 가장 잘 가꾸고 지킨 나라다.
탄자니아를 이런 나라로 만든 인물이 바로 줄리어스 니에레레(Mwalimu Julius Kambarage Nyerere)다.
독립투사이면서 나중에 대통령을 지낸 니에레레를 탄자니아 사람들은 '음왈리무(Mwalimu)', 그러니까 '쌤'이라고 부른다.
이 형님 이야기는 무슨 영웅담 이런 게 아니라, 꿈이랑 현실 사이에서 오지게 고민하고, 아프리카만의 길을 찾으려고 발버둥 쳤던, 진짜 땀내 나는 스토리를 가진 인물이다.
물론 오류와 좌절도 있었다.
20년이 넘는 장기 집권은 독재임에 틀림없다.
사회주의 정책은 경제 발전을 가로막았다.
그럼에도 니에레레는 부패와 비리에 빠지지 않고 독립된 나라, 형제애로 뭉친 아프리카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55개 나라마다 니에레레 같은 사람이 지도자였다면, 오늘의 아프리카는 지금과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때는 1922년 4월 13일.
영국 식민지였던 탕가니카(탄자니아 본토 옛 이름) 북쪽, 빅토리아 호수 근처 부티아마(Butiama)라는 깡촌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줄리어스의 아버지는 자나키 부족 추장이긴 했는데, 아들이 무려 26명!
니에레레는 딱히 '금수저' 물고 태어난 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머리가 비상했다.
동네 미션 스쿨 다니고, 옆 나라 우간다에 있는 꽤 괜찮은 마케레레 대학교(Makerere University)까지 졸업.
대망의 1949년, 영국 스코틀랜드에 있는 에든버러 대학교(University of Edinburgh)로 유학을 간다.
탕가니카 땅에서 영국 대학 졸업장 딴 최초의 인물이 된다.
에든버러, 거긴 좀 춥고 낯설었겠지만, 니에레레 머릿속은 뜨거웠다.
역사와 정치경제학을 파면서 깨달았다.
'아놔, 이 식민지배 X같네!'
니에레레는 당시 많은 젊은이들처럼,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사회주의 사상, 특히 아프리카 전통 공동체 정신과 통하는 연대와 투쟁의 역사관에 확 꽂혔다.
'그래, 우리 아프리카는 우리 방식대로 가야 해!'
이때 품은 생각이 바로 훗날 탄자니아를 뒤흔들 '우자마(Ujamaa)'의 씨앗이 되었다.
1952년, 학위 따고 고향 컴백.
니에레레는 다시 학교 선생님이 됐다.
근데 그냥 쌤이 아니었지.
똑똑하고, 열정 넘치고, 겸손하기까지 하니까 학생들이 완전 따랐다고 한다.
그래서 '음왈리무(Mwalimu - 스와힐리어로 쌤!)'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게 평생 가는 그의 별명이자 상징이 된다.
그의 교실은 그냥 칠판에 글씨 쓰는 곳이 아니었다.
미래에 대한 고민, 조국 독립에 대한 열망이 부글부글 끓는 용광로 같았다.
여기서 그 유명한 질문이 터져 나온다.
어느 날, 흙먼지 풀풀 날리는 교실이었겠지.
영국 관리들 눈치 보며 수업하던 그때, 용감한 학생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목소리는 좀 떨렸을지도 모른다.
"쌔... 쌤! 근데요, 우리는 왜 맨날 영국 놈들 말(영어)만 이렇게 빡세게 배워야 해요? 우리 말도 있는데!"
교실 안 공기가 순간 싹 얼어붙었을 듯 하다.
식민지 현실에 대한, 어쩌면 당연하지만 누구도 쉽게 묻지 못했던 질문이었으니까.
니에레레는 잠시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겼을 터다.
그리고는 질문한 학생의 눈을 똑바로 보며,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이봐, 동무. 잘 들어. 언어는 그냥 도구야. 칼 같은 거지. 지금은 저놈들이 가진 날카로운 칼을 우리 손에 쥐는 법부터 제대로 배워야 해. 그래야 언젠가 그 칼로, 우리를 꽁꽁 묶고 있는 이 지긋지긋한 밧줄을 끊어버리고, 이 땅의 진짜 주인이 될 수 있는 거야. 뭔 말인지 알겠나?"
그냥 '배워둬, 쓸데 있어'가 아니었다.
식민지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걸 넘어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무기로 삼겠다는, 뼈 있는 대답을 했다.
이게 바로 니에레레의 현실 감각과 큰 그림이었다.
그의 대답은 훗날 탄자니아와 아프리카의 통합을 위해 스와힐리어 사용를 밀어붙이는 것으로 이어진다.
.
니에레레 가슴 속엔 교실보다 더 큰 불, '우후루(Uhuru - 자유)'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당시 탕가니카는 120개가 넘는 부족으로 갈기갈기 나뉘어 영국 애들한테 '분할 통치' 당하고 있었다.
니에레레는 보았다.
'이대로 가면 다 같이 망한다! 뭉쳐야 산다!'
이승만 아님.
1954년 7월 7일, 그는 탕가니카 아프리카 민족 연합(TANU) 깃발을 빡! 올리고 독립 운동 선봉에 섰다.
근데 총칼 들고 싸운 게 아니었다.
인도의 독립 지도자 간디에게 영향받아서 비폭력 운동을 밀었다.
윗 동네 케냐에선 '마우 마우' 봉기처럼 피바람 불 때도 있었는데, 니에레레는 좀 달랐다.
백인 정착민이 케냐보다 적었던 탓도 있겠지만, 그의 비폭력 리더십은 효과를 발휘했다.
그의 진짜 무기는 '말빨', 특히 스와힐리어였다.
특정 부족 말이나 식민지배국 영국의 언어가 아니라 동아프리카 전체에서 통하는 스와힐리어로 외쳤다.
"우리는 다 같은 탕가니카 사람이다! 스와힐리어로 하나 되자! 우후루!"
시장 바닥에서, 학교 운동장에서, 그의 진심 어린 연설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었다.
TANU는 그야말로 국민 정당이 됐다.
마침내 1961년 12월 9일!
탕가니카는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독립을 따냈다!
니에레레는 초대 총리, 이듬해엔 초대 대통령이 됐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1964년 4월 26일, 옆 섬나라 잔지바르(혁명으로 왕정 뒤집어짐)랑 합체!
그렇다.
탄자니아라는 이름은 탕가니카+잔지바르 였다.
마침내 탄자니아 연합 공화국이 탄생했다.
아프리카 대륙 국가와 섬나라가 자발적으로 합친 건 진짜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니에레레의 '아프리카는 하나다!' 정신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제 니에레레는 자기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이상 사회 만들기 프로젝트, '우자마(Ujamaa)'를 시작한다.
스와힐리어로 '가족애', '공동체 정신' 뭐 이런 뜻인데, 아프리카식 사회주의를 일컫는 말이라고 보면 된다.
1967년 아루샤 선언으로 공식 스타트!
"우리가 다 부자는 못 돼도, 다 같이 굶지는 말아야지!"
이게 니에레레 생각이었다.
평등하고 협력하는 사회!
여기서 재미있는 대목.
바로 탄자니아 북쪽의 나라 케냐 이야기다.
같은 시기 케냐에는 니에레레 급의 국부, 조모 케냐타가 있었다.
케냐탸의 선택은 니에레레와 조금 달랐다.
케냐타는 영국 물 제대로 먹은 엘리트에 인류학자이기도 했는데(자기 부족 키쿠유의 역사를 연구해서 책도 씀!), 독립 후 시장 경제와 수출 농업에 집중했다.
케냐의 경제 발전은 탄자니아보다 빨랐다.
수도 나이로비는 번쩍번쩍한 도시가 됐다.
반면, 탄자니아의 우자마는... 음... 경제적으론 폭망 루트를 탔다.
이웃 나라와 사이 좋은 곳이 없지만, 탄자니아는 오랫동안 케냐에 억울한 일을 당했다.
세렝게티나 킬리만자로가 분명 탄자니아에 있는데도, 많은 관광객들은 케냐를 통해 이 곳을 여행했다.
커피도 마찬가지. 킬리만자로의 고산 지대에서 최고급 커피를 생산했지만, 케냐가 이를 로스팅해서 수출하는 최고 등급 커피를 '케냐AA'라고 이름 지었다.
탄자니아가 용을 쓰는데 케냐가 돈을 버는 형태였다.
탄자니아은 사회주의 국가, 케냐는 친미 정권의 친서방 국가여서 벌어진 일이었다.
또 하나 한국인에게 흥미로운 사실은, 탄자니아가 북한과 오랫동안 수교하고 교류했다는 사실.
개인적으로 2000년대 초 탄자니아를 처음 갔을 때,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흑인 할아버지를 만났다.
평양 김일성대학에서 조선어를 배운 엘리트였다.
탄자니아는 합병 전 잔지바르가 1965년 북한과 수교했다.
잔지바르에는 무려 '김일성 경기장'이 들어서 있다.
당시 수교 기념으로 북한이 지어 준 시설이다.
대한민국은 1992년에 와서야 수교했다.
지금도 탄자니아에는 남북한의 대사관이 다 있다.
한 우자마 마을에 번쩍이는 새 트랙터가 딱 들어왔다.
정부에서 "이걸로 농사 대박 내세요!" 하고 준 보급품.
애들은 신기해서 막 올라타고 난리 났겠지.
농부 아재들은 황당했다.
"아니, 이걸 워떻게 몰아? 기름은 어디서 넣고? 고장 나면 누가 고쳐?"
평생 소만 몰았던 사람들한테 트랙터는 외계 물건이었다.
결국 그 비싼 트랙터는 몇 번 낑낑대다 마을 구석에서 녹슬어 갔고, 농부들은 다시 익숙한 소 궁둥이 두드리며 밭으로 나갔다는 슬픈 전설...
이게 바로 책상머리 정책의 한계였다.
경제는 말아먹었지만, 니에레레는 국제 사회에서 '리스펙' 받는 지도자였다.
왜냐?
1985년 11월!
니에레레는 아프리카 정치사에 길이 남을 일을 저질렀다.
스스로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온 것!
아프리카의 다른 독재자들이 죽을 때까지 해먹거나 쿠데타로 쫓겨나던 시절!
대한민국도 아직 전두환 정권에서 신음하던 때였다.
니에레레는 퇴임 연설에서 "우자마 경제 정책, 내가 실패했다. 미안하다" 솔직하게 인정했다.
"지도자는 횃불 같은 거다. 이제 내 횃불은 다 탔으니 새 횃불이 필요하다"
이런 명언 날리면서 후임한테 평화롭게 자리를 넘겼다.
권력에 미친 게 아니라 진짜 나라 걱정한 것이다.
이런 결단이 탄자니아와 니에레레를 아프리카의 신화로 만들었다.
퇴임한 니에레레는 고향 부티아마 가서 조용히 농사짓고 책 쓰면서 살았다.
평생 검소하게 살았던 그대로.
그렇다고 완전 은둔한 건 아니고, 나라 돌아가는 거에 쓴소리도 하고, 부룬디 내전 중재 같은 국제 활동도 했다.
셰익스피어 작품(줄리어스 시저, 베니스의 상인)을 스와힐리어로 번역하면서 문화 발전에도 힘썼다.
1999년 10월 14일, 니에레레는 영국 런던 병원에서 백혈병으로 눈을 감았다.
향년 77세.
그의 시신이 돌아왔을 때, 탄자니아 국민 수십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울면서 '음왈리무'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니에레레는 완벽한 영웅은 아니었다.
실수도 많았고, 비판받을 점도 분명히 있다.
경제 말아먹은 거 팩트고, 독재한 것도 팩트다.
근데...
아프리카 현대사를 보면 가장 많은 지도자 유형은 애국심에 불타는 독립투사 → 독립 후 집권 → 장기 독재 → 부패와 엉망진창 경제 의 테크트리를 타는 인물이다.
그렇지 않은 지도자 중에 케냐타처럼 경제는 키웠지만 부족 갈등 심화시킨 리더도 있고, 니에레레처럼 경제는 실패했지만 국민 통합과 안정은 이룬 리더도 있고, 부르키나 파소의 토마스 상카라 처럼 강대국의 개입으로 개혁이 좌절된 경우도 있다.
뭐가 정답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확실한 건, 니에레레는 식민지배 아픔 딛고, 서구 따라 하기가 아니라 아프리카만의 방식으로 잘 살아보려고 진심으로 애썼던 이상주의자였다는 점이다.
그 진심이, 비록 경제적으론 실패했을지언정, 탄자니아라는 나라를 하나로 묶고 평화의 씨앗을 심는 데는 성공한 것은 확실하다.
우리가 탄자니아를 평화롭게 여행하고 세렝게티의 아름다운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것도 니에레레가 심어놓은 평화와 하나의 아프리카를 꿈꾼 그의 비전 덕분이다.
그래서 탄자니아 사람들은 지금도 그를 '음왈리무', 우리의 영원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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