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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사회주의를 경계한 사회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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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perback Writer 2025. 3. 23.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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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이한중 옮김, <위건부두로 가는 길>, 한겨레출판, 2010

조지 오웰(1903-1950)은 필명.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
인도 식민 관료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이튼스쿨을 졸업하고 자신도 인도의 식민경찰로 일했다.
회의적인 사회주의자로 당시 자본주의의 첨단이었던 영국 사회는 물론 이를 비판한 스탈린식 사회주의도 비판했다.
 
1부는 레프트북클럽이라는 4만명 회원을 가진 모임의 의뢰를 받아 쓴 르포르타쥬다.
위건을 포함한 영국 북부의 탄광 지역의 실태를 직접 체험해서 썼다.
노동자들의 여인숙에서 살고 탄광에서 일하며 쓴 생생한 글이다.
2부는 자신의 주장을 담은 정치적 에세이.
지식인 중심의 사회주의 정치운동이 노동자 계급과 진정으로 연대하지 못함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이런 위선이 파시즘의 토양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1부와 2부를 읽은 소감이 다르다.

 

1부 - 세밀하고 과학적인 르포

지금은 체험형 르포가 드물지 않고, 19세기 후반 영국 노동자 계급의 비참함에 대한 글은 이 전에도 읽었기에, 내용 자체가 새롭거나 대단하게 다가오진 않았다.
인상적인 것은 현실을 묘사하는 조지 오웰의 태도다.
노동자 가족들의 삶을 더 비극스럽게, 더 분노와 슬픔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쓸 수도 있었을텐데,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감정적이거나 선동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자들의 삶을 존중하고 영국 산업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다고 미화하지도 않는다.
집의 냄새, 세탁, 수입과 지출 같은 것을 직접 현장에 뛰어든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세히 취재해 기록한다.
마치 통계 기록과 같아서 나중에도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하이라이트는 집을 찾아가고 여관에 머물면서 겪은 냄새를 묘사하는 부분.
이 책의 전체를 관통하는 이미지처럼 여겨질 정도로 적나라하다.
읽다 보면 카를 마르크스의 '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가 떠오른다.
결론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가난과 소외는 이들의 천성 때문도, 영국 북부라는 지리적 문화적 특성 때문도 아니고 얼마든지 개선할 수 있는 구조적인 문제임을 잘 설명해주었다.
 

위건 지역 탄광의 광부들.
조지 오웰의 위건 시절. 진짜 사진인지는 모르겠다.

2부 - 아랫것들은 냄새가 나

“아랫것들은 냄새가 나.”
가장 인상적인 구절이다.
상류층의 하류층(?)으로 자란 조지 오웰은 어릴 적부터 이렇게 하층 계급을 멸시하고 혐오하도록 교육 받았다고 고백한다.
1부에서도 냄새 얘기가 자주 나온다.
냄새와 함께 억양, 용어 등을 거론하면서 그는 영국의 사회주의 주류를 이루는 지식인들의 태도가 노동자들이 사회주의에서 멀어지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그 원인을 그는 사회주의 이념 자체에서 찾는다.
사회주의는 기계문명을 전폭적으로 긍정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들 역시 당시 자본주의가 빚은 무질서와 오염을 거부해 다른 질서를 원하는 부류라는게 냉정한 분석이다.
그들이 결코 노동자 계급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고 싸우려는 이들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가장 시급하게는 당시 유럽에서 세력을 확장해가던 파시즘과의 이념 경쟁에서 사회주의가 지고 있다고 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은 당대의 억압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촉구한다.
 
조지 오웰이 지적하는 현상이 어쩌면 오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탄핵과 반탄핵의 갈등에서도 비슷하게 나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1921년 위건에서 찍힌 사진. 광부의 딸이 강아지를 들고 있다.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글귀 모음

 

우리 문명의 기반은 석탄이다. 그것은 곰곰이 생각해서 깨닫는 것 이상으로 완벽하게 그렇다. 우리를 살게 해주는 기계가, 그 기계를 만드는 기계가 전부 직간접적으로 석탄에 의존하고 있다. (31쪽)

 

노동 계급이 겉으로나마 보이고 있는 적응은 그들이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혁명적으로 변한 것도 자존심을 잃은 것도 아니다. 단지 노여움을 참고, 피시 앤드 칩스 수준에서 그럭저럭 견뎌 나가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121쪽)

 

나는 먹을거리의 변화가 왕조나 종교의 변천보다 중요하다는 주장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통조림 음식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세계대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124쪽)

 

참 얄궂은 것은, 돈이 없는 사람일수록 건강에 좋은 음식에는 돈을 쓰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백만장자라면 아침 식사로 오렌지주스와 리비타 비스킷을 즐길 수 있을 테지만, 실업자는 그렇지가 않다. ... 말하자면 실업자가 되어 못 먹고 시달리고 따분하고 비참한 신세가 되면, 몸에 좋은 음식은 심심해서 먹기가 싫은 것이다. 그보다는 먹는 재미가 있는 게 좋으며, 그럴 때 유혹하는 싸고 그럴싸한 먹을거리는 언제든 있게 마련이다. (129쪽)

 

흰 빵에 마가린에 설탕 친 차는 영양에 별 도움이 되지 않으나, 누런 통밀 빵에 비계에 찬 물보다는 근사한 것이다. 실업으로 인한 끝없는 비참함은 계속해서 고통 완화제를 필요로 하며, 그런 차원에서 차야말로 영국인의 아편이다. 차 한 잔이나 아스피린 한 알이 통밀 식빵 한 조각보다는 훨씬 나은 일시적 흥분제가 되는 것이다.(129~130쪽)

 

우리 시대가 살기에 완전히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음을 나에게 일깨워주는 것은 근대 기술의 승리도, 라디오도, 영화도, 매년 5천 종씩 출간되는 소설도, 애스컷 경마장의 인파도, 명문교 이튼과 해로의 크리캣 라이벌전도 아니다. 그것은 참으로 묘하게도 내 기억에 남은 노동 계급 가정의 거실 풍경이며, 그중에서도 아직 영국의 번영기이던 전쟁 이전의 내 어린 시절에 이따금 보았던 정경들이다.(159쪽)

 

그게 우리가 듣고 자란 말이다. “아랫것들은 냄새가 나.”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넘을 수 없는 장벽과 마주친다. 어떤 호감도 혐오감도 몸으로 느끼는 것만큼 근본적일 수는 없다.(172쪽)

 

우리 모두 계급 차별을 맹렬히 비난하지만 그것이 정말 없어지기를 진지하게 바라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212쪽)

 

지금처럼 계급 문제를 너무나 어리석게 다룬다면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을 쫓아버려 파시스트로 만들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231쪽)

 

대부분의 중산층 사회주의자들이 이론적으로는 계급 없는 사회를 위해 애쓰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구질구질한 사회적 위신에 악착같이 매달린다는 추악한 현실도 고려해야 한다.(234쪽)

 

뮤직홀의 실력 있는 코미디언들이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어느 사회주의 작가보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가까운 것을 만들어 낸다고 하겠다.(235쪽)

 

물론 사람들이 좋아하든 말든 수고를 덜어주는 저 유명한 ‘역사적 필연’이라는 것 때문에 사회주의가 도래할 수 밖에 없다고 하는 해묵은 주장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 필연은, 또는 그것보다는 그것에 대한 믿음은 히틀러를 만나 살아남지 못하게 되었다.(283쪽)

 

지적으로는 대개 좌파이지만 기질적으로는 흔히 우파인 사람은 사회주의 단체의 문 앞을 서성이고 있다. 그는 자신이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먼저 사회주의자 개개인의 우매함과 맥없어 보이는 사회주의 이상을 목격하고는 다른 데로 가버린다.(283쪽)

 

사회주의를 잘못 비치게 하면(이를테면 꽉 막힌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명령에 따라 유럽 문명을 하수구에 흘려보내는 것밖에 안 되는 무엇으로 보이게 하면) 지식인을 파시즘 쪽으로 쫓아버리는 위험을 저지르는 것이다. 사람을 질려버리게 만들어 사회주의자의 입장이라면 무조건 화를 내며 거부해버리는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하는 일 말이다. (286쪽)

 

파시즘의 근간이 되는 정서, 즉 사람들을 처음 파시즘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정서는 그리 한심한 게 아니다. 파시즘은 ‘세터데이 리뷰’가 심어주려는 인상, 말하자면 볼셰비키 요괴가 악을 쓰는 끔찍한 꼴을 보이기만 하는 게 아니다. 파시즘 운동을 어느 정도 지켜본 사람이라면 말단의 파시스트 당원이 반듯한(이를테면 실업자의 운명을 개선하고자 하는 열의가 진지한) 사람이라는 걸 안다. ... 전통과 질서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파시즘을 일단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요령 없는 사회주의자들의 선전만 잔뜩 듣다 보면 파시즘을 유럽 문명의 장점을 지킬 마지막 방어선으로 보게 되기가 아주 쉽다. ... 우리는 파시즘이 어디서나 약진한다면 그것은 우선 사회주의자들 자신의 잘못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287쪽)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에겐 영혼이란 게 없다는 가정에 따라 활동해왔으며, 노골적으로건 암시적으로건 물질적 유토피아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말았다. 때문에 파시즘은 쾌락주의와 진보라는 값싼 관념에 반발하는 모든 충동을 이용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해 파시즘은 유럽 전통의 옹호자 시늉을 할 수 있었으며, 기독교 신앙과 애국주의와 군사적 가치에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파시즘을 집단 사디즘이니 뭐니 하며 간단히 무시해버린다면, 그냥 무익하기만 한 게 아니라 몹시 해로울 수 있다. 파시즘을 머지않아 절로 사라질 예외적인 현상인 듯 여긴다면, 누구에게 몽둥이로 얻어맞고서 깨어날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288쪽)

 

사회주의 운동은 변증법적 유물론자들의 리그가 될 여유가 없다. 그것은 압제자에 맞서 싸우는 피압제자의 리그가 되어야 한다.(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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